한국일보 2020. 08. 04 고대현 소이프(SOYF) 대표는 "누구나 좌절을 겪을 순 있지만, 보호종료 아동들에겐 그 좌절을 견대낼 수 있도록 도와주고 기회를 주는 어른이 없다는 점이 가장 안타깝다"고 말했다. 정준희 인턴기자 요보호 아동. 예전엔 ‘고아원’이라 불렸던 보육시설에서 생활하는 아동ㆍ청소년을 지칭하는 용어다. 말 그대로 보호가 필요한 아이들이다. 하지만 이율배반적으로 이들에게 ‘보호’가 제공되는 기한은 만 18세로 못박혀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보호종료 아동’이 돼야만 한다. 부모 품 안에서 자란 아이들이 대학에 진학함과 동시에 해방 혹은 탈출을 꿈꾸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얘기다. 최근 한 구인구직 업체에서 2049세대 1,59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절반이 넘는 51.3%가 스스로를 부모에게 의존하는 ‘캥거루족’이라고 응답했다. 조사에 응한 30대의 51.2%, 40대의 42.7%가 자신을 캥거루족이라고 밝혔다. 부모가 있는 이들의 현실과 그렇지 못한 보호종료 아동의 현실은 이렇게 극명하게 갈린다. 요즘 같이 치열한 세상에서, 비록 나이는 성인이지만 버팀목 하나 없는 이들이 등 떠밀려 이룩하는 자립은 지극히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보호종료 아동이라는 용어 자체가 아이러니다. 매년 약 2,500명의 ‘어른 아이’는 그렇게 사회에 던져진다. 이들의 제대로 된 자립을 돕는 사회적 기업이 있다. 요보호 아동에게 직업 훈련의 실무 기회를 제공하고, 보호종료 아동에게는 사회적 커뮤니티를 통해 비빌 언덕이 되어 주는 곳이다. 회사 이름은 소이프(SOYF). 너의 발로 스스로 일어서라(Stand On Your Feet)는 뜻이다. 최근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 주택가 사이에 있는 상가 건물의 소이프 사무실에서 만난 고대현(38) 대표는 처음 보육시설 아이들을 만나게 된 계기를 묻자 "2014년 초 동아리 지인의 제안으로 사진 출사 봉사활동을 나갔을 때”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고 대표는 "대전에서 서울로 이사오겠다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서울에 올 때마다 같이 방을 보러 다닌다"며 "비록 작은 도움이지만 그럴 때 곁에 있어주고 응원해주는 사람들 덕에 나 스스로도 버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정준희 인턴기자 고 대표는 “처음엔 가벼운 마음으로 나갔는데, 내가 하던 일을 그만두고 이 아이들을 위해 사회적 기업까지 만들 줄은 정말 몰랐다”고 했다. ‘가벼운 마음’의 봉사활동은 3년간 계속됐다. 한 달에 한번 아이들을 만나 서울 곳곳을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그러면서 포토샵과 일러스트 등 이미지 편집 프로그램을 가르쳤다.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이 찍은 사진으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도록 사진 에세이를 써 보기도 했다. ‘진정한 자립은 자기 스스로를 제대로 아는 것부터 시작한다’는 고 대표의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3년의 시간이 흘러 중학생이던 친구는 고등학생이 됐고, 고등학생이던 친구는 퇴소를 했다. 고 대표가 이들의 현실을 직시한 건 이 때부터였다. “사실 저희는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같이 사진 찍으러 다니면서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에세이를 쓰면서 스스로에게 닫혀 있던 감정의 문을 조금씩 여는 걸 보면서 뿌듯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퇴소 후에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 알게 되자 봉사활동 만으론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죠.” 퇴소한 아이들은 살 집과 직장을 구하는 일부터 녹록지 않다. 부동산 법률 지식이 부족한 탓에 사기에 노출되는 경우도 있고, 회사에 취직을 했다가도 업무나 대인관계에 적응하지 못해 금새 그만두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다 보니 생활고는 일상이 된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남학생은 절도, 여학생은 유흥업소 등의 유혹에 넘어가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1년 정도 회사에 다니다가 퇴사한 후 생활고 때문에 자살한 친구의 사연도 접했다. 고 대표는 “이 아이들이 퇴소하자마자 잘못된 길로 빠져드는 건 아니다”라고 했다. “어떻게든 열심히 살아보려고 노력하지만, 현실의 벽 앞에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좌절의 순간을 극복하지 못하고 무너져 버리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어른 아이’에게는 아직 모를 때 물어보고, 힘들 때 기대고, 방황할 때 붙잡아줄 수 있는 ‘진짜 어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고 대표는 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만한 일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7년 봉사활동을 같이 했던 동아리 멤버들과 함께 사회적 기업을 만들었다. 시각디자인을 전공해 의류회사 매장 직원부터 구매전문(MD)까지 경험해 본 고 대표의 경험을 살려 디자인 회사를 차렸다. 의류나 잡화 디자인 제품을 만들어 네이버 스마트 스토어 등을 통해 판매하고, 외부 의뢰를 받아 BI나 CI를 제작하거나 브로셔 등을 만드는 일도 한다. 소이프에서 보육시설 아동들이 직접 참가해 만든 양말 제품들. 소이프 제공 소이프가 만드는 디자인 제품에는 보육시설 아동들이 직업 교육 과정에서 낸 아이디어가 녹아 있다. 자신이 미래에 살 집을 떠올린 꿈이 양말에 스며들었고,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며 만든 캐릭터가 티셔츠와 에코백에 자리잡았다. 이렇게 디자인 교육을 받고 제품 생산에 참여한 교육생들은 지금까지 총 30여명 정도. 이들 중에는 디자인 고등학교를 졸업해 소이프에 입사한 친구도 있었다. 지금은 퇴사하고 자신이 졸업한 학교의 보조 교사로 일하고 있다. 고 대표는 “방황할 때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계기를 줘서 고맙다”는 이 친구의 메시지를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고 대표 자신 또한 학창시절 크게 방황한 경험이 있었고, 어머니가 기회를 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자신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왔던 그다. 그에게 어머니가 기회를 줬듯이 아이들에게 소이프가 어머니가 돼 줬다면, 고 대표의 노력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술을 많이 드시고, 가정폭력도 있었어요. 고등학교 때 어울리던 친구들 7명 중 5명이 안 좋은 일로 자퇴를 했어요. 친구들이 떠나자 학교를 다니기 싫어서 자퇴할까 고민도 했어요. 그 때 저를 붙잡아 준 게 어머니였어요. 맨날 그림 그리고 만화책 보는 거 좋아하니까 미술이라도 해 보라고. 저한테는 그게 큰 계기가 됐어요. 믿어주고 뭔가를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어른. 하지만 이 아이들에겐 그런 어른이 없는 거죠.” 소이프의 허들링 커뮤니티를 통해 보호종료 아동들이 자취 요리를 배우고 있다. 소이프 제공 소이프는 허들링 커뮤니티라는 모임을 만들어 퇴소한 친구들의 사회 정착을 돕는다. 처음엔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걱정돼서 같이 밥 먹는 모임으로 시작했던 게 이제는 20~30명 정도의 친구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거창한 건 아니다. 부동산 계약할 때 꼭 알아야 하는 법률 상식, 한의사가 알려주는 건강관리법, 자취생이 해 먹을 수 있는 간단한 요리법 등을 알려주는 식이다. 지난해 11월엔 ‘보호종료 아동’이라는 용어를 사회에 알리기 위해 토크 콘서트도 열었다. 국회의원들조차도 용어를 제대로 몰라 ‘보호종료 아동’이 뭐냐고 되묻는 판에 이들의 자립을 돕는 제도적 마련은 너무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이프가 번 돈은 이렇게 다양한 ‘돈 안 되는 활동들’에 쓰이는 바람에 아직 손익분기점은 못 넘겼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 욕심이 많다. 돈 쓸 곳이 한 두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행히 회사는 매년 200%가 넘게 매출이 늘고 있다. 소이프의 철학에 공감한 후원자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보호종료아동 인식확산을 위한 캠페인의 일환으로 지난해 11월 열린 토크콘서트 '꽃길만'에서 참가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소이프 제공 고 대표가 창업할 때 함께 시작한 이들과 약속한 시간은 10년이다. 소이프는 자기들 회사가 아니라, 잘 준비하고 정말 의지가 있는 친구가 있다면 보호종료 아동 중에 누군가가 맡아서 키워가는 게 맞다는 생각이다. 진짜 주인을 찾기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6년 남짓. 고 대표는 그 이후에 캄보디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게 목표다. “일하면서 혹은 봉사활동차 캄보디아에 몇 번 갔었어요. 40대 부모가 12살 아이에게 돈 벌어오라고 공장에 보내는 일이 허다한 곳이었죠. 심지어 남자아이들은 버려지는 경우도 많았어요. 결혼할 때 남자는 돈을 내고, 여자는 돈을 받기 때문이죠. 부모가 제대로 된 버팀목 역할을 못해주고 있는 게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가슴 아픈 상황은 해외에서도 그대로 벌어지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꿈은 이미 캄보디아로 향해갔다. "결국 이 아이들이 사람다운 삶을 살려면 교육을 받을 기회가 절실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2시간 거리를 걸어서 학교에 가야 하는 아이들을 위해 조그만 방 한 칸짜리 학교라도 짓고 싶어요. 6년 후엔 제가 캄보디아에 있었으면 좋겠네요.” 김경준 기자 ultrakj75@hankookilbo.com 원문보기 :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0080314110003015?did=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