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23.06.21 "내 손을 잡아", 자립준비청년이 듣고 싶었던 말 영화 '그래비티'는 10년 전 개봉, 아카데미상 7개 부문을 휩쓸며 우주 영화 새 장을 열었습니다. 우주를 탐사하던 라이언 스톤 박사가 사고로 폭파된 인공위성 잔해와 충돌, 우주 미아가 돼 표류하며 겪는 이야기입니다. 아이를 잃고 일상과 인간관계에 염증을 느낀 스톤은 고요한 우주를 갈망했지만 재난을 만나며 역설적으로 나와 타인을 이어줄 관계, 끌어당김(gravity‧중력)의 가치를 깨닫게 되죠. 이 영화에 영감을 받아 나온 프린팅 티셔츠가 있습니다. '내 손을 잡아(Hold my hands)'라는 이름의 이 티셔츠는 18세이면 독립해야 하는 '열여덟 어른', 어느 자립준비청년이 디자인한 겁니다. 한 자립준비청년이 영화 '그래비티'를 보고 영감 받아 디자인한 '내 손을 잡아(Hold My Hands)' 프린팅 티셔츠. 사진 소이프 자립준비청년은 보육원·공동생활가정·위탁가정 등 시설에서 살다 독립한 청년입니다. 보호 아동은 국가가 정한 보호 종료 연령인 만18세(본인 의사에 따라 만 24세)에 시설에서 나와 독립해야 하죠. 티셔츠를 디자인한 이 친구 역시 6년 전 자립을 목전에 준 보호 아동이었습니다. 세상에 홀로서기보다 두려운 건 주변의 차가운 시선과 단절이었어요. 삶의 방향타가 돼야 할 학교 선생님조차 이유 없는 차별적 언행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억울함과 분노, 두려움 등 부정적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때 그는 봉사활동을 하며 연을 맺은 고대현 소이프 대표이사 앞에서 꺽꺽 소리 내 울었죠. 이미 보육원 등에서 꾸준히 재능기부를 이어가며 아동‧청소년 자립에 관심을 가져온 고 대표는 보다 근본적으로 이 문제에 다가가고 싶었습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기준 한 해 홀로서기에 나서는 자립준비청년만 약 2500명. 경제적인 문제뿐 아니라 이들의 심리적 고립이 큰 문제로 느껴졌습니다. 자존감을 끌어올려 자신의 쓸모 있음, 소중함을 깨닫게 하고 활발한 사회 교류의 장을 만들어주고 싶었죠. 일회성 지원이 아닌 꾸준히 곁을 내어주며 스스로 일어설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겁니다. 2017년 사회적 기업가 육성사업을 통해 '소이프(Stand On Your Feet)'는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자립준비청년이 시설 퇴소 후 살고 싶은 내 집, 나의 삶이 형상화된 양말. "올해 3대 명산 등반에 도전해 볼 것"이라는 한 자립준비청년의 바람이 양말 디자인에 담겨있다. 사진 소이프 열여덟 어른의 속 얘기, 양말 디자인이 되다소이프는 디자인 기업입니다. 대학에서 의상 디자인을 전공하고, 의류회사 매장 직원부터 구매 전문(MD)까지 두루 경험한 창업자 고 대표가 가장 잘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창업 이후 6년 넘게 이 회사와 브랜드를 지탱하는 힘은 자립준비청년들입니다. 소이프는 디자인 아카데미를 꾸려 이들에게 필수적인 교육을 해주죠. 교육 대상자는 신청자를 받아 간단한 면담을 거쳐 선정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꼭꼭 숨겨둔 이들의 마음을 끄집어내는 것. 소이프의 전 제품에는 자립준비청년 각각의 마음의 목소리가 담겨 있는데요. 사람에 대한 상처가 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끄집어내는 데 인색한 이들이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도록, 고 대표를 포함한 소이프 구성원은 꾸준히 소통하고 관계를 만들어 나가고 있죠. 이 과정에서 나온 열여덟 어른의 갖가지 속 얘기들이 제품 디자인의 주축이 되는 겁니다. 이를테면 색감이 돋보이는 소이프 대표 5종 제품 양말에는 시설 퇴소 후 살고 싶은 내 집, 나의 삶이 형상화돼 있죠. 자립준비청년이 시설 퇴소 후 하고 싶은 각자의 버킷리스트를 형상화한 양말. "테니스를 치면서 사람과 소통하고 싶다"는 한 자립준비청년의 바람이 담겨 있다. 사진 소이프 "매일 친구들과 함께 파티할 수 있는 따뜻한 집이면 좋겠어요", "자연을 느낄 수 있는 등산을 해보려고요. 올해 3대 명산에 도전해 볼 거예요", "테니스를 치면서 사람과 소통하고 싶어요", "카메라를 좋아해요. 올해는 사진과 영상 찍는 법을 전문적으로 배워보고 싶어요", "자립 후 해 본 적 없는데 올해부터 제 손으로 직접 요리도 하고 건강해질 거예요" 속 얘기라 하니 거창할 것 같지만 바람은 평범하고 소소하죠. 누구에게는 그냥 실없이 내뱉을 수 있는 이런 바람조차도 웃으며 당당하게 입 밖으로 꺼내는 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곁을 내어주며 진심으로 목소리를 들어줄 이들이 부족했기 때문이죠. 양말 등 소이프 전 제품은 자체 온라인 몰, 네이버 쇼핑을 통해 판매되고 있습니다. 판매 수익금의 5%는 자립정착금으로 쓸 수 있도록 국가가 운영하는 아동발달 지원계좌 디딤씨앗통장에 저축해주거나, 긴급하게 필요할 때 쓸 수 있도록 개인 통장에 넣어줍니다. 자립준비청년이 시설 퇴소 후 하고 싶은 각자의 버킷리스트를 형상화한 디자인 양말. 사진 소이프 카카오·한국콜마와 협업도6년간 꾸준히 업을 이어오며 소이프에게도 기쁜 일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뜻있는 일에 힘을 보태겠다는 대기업들의 연결도 계속되고 있죠. 올 3월에는 카카오의 커머스 사내독립기업(CIC)이 운영하는 '카카오톡 쇼핑하기'에서 먼저 문을 두드려줬습니다. ESG 경영 목적으로 시작하는 상생 브랜드 발굴 프로젝트 1탄에 소이프도 합류하게 됐죠. 상품 컨설팅뿐 아니라 온라인 판로가 확대되는 등 소이프는 든든한 우군을 얻게 된 셈입니다. 카카오톡 쇼핑하기 상생 브랜드 발굴 프로젝트 1탄에 합류하게 된 소이프. 사진 카카오 쇼핑하기 캡처 화장품 ODM(제조자개발생산) 기업인 한국콜마는 해마다 자립준비청년을 위한 후원금을 내놓고 있는데요. 올 11월께 소이프와 협업해 핸드크림 세트(패키지)를 내놓는다네요. 화장품은 한국콜마가 만들고, 패키지 디자인은 소이프 디자인 아카데미를 수료하고 최근 서울 시내 한 여대 디자인과에 입학한 비또(닉네임)라는 한 자립준비청년이 맡게 될 예정입니다. 비또라는 닉네임을 쓰고 있는 한 자립준비청년이 디자인한 '비또의 집' 그림. 퇴소 후 살고 싶은 집을 형상화했다. 사진 소이프. 펭귄 무리가 체온을 나누는 '허들링'처럼자립준비청년에겐 자립정착금 800만~1000만원이 지급됩니다. 자립수당은 월 40만원씩 최장 5년간 지원받을 수 있죠. 홀로서기에 충분한 돈은 아니지만, 적은 돈도 아닙니다. 고 대표는 "외려 지원금이 독이 되고 있다는 얘기가 아이들(자립준비청년)에게서 나오고 있다"며 "고민이 있을 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이들, 언제든 도움과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어른, 고민 동반자가 어쩌면 더 절실할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소이프는 꾸준한 정서적 연결을 위해 '허들링'이란 멘토링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요. 허들링은 남극의 펭귄들이 추위를 견디기 위해 무리를 지어 체온을 유지하는 공동체 행동을 말하는데요. 매년 30여 명을 기수제로 운영하면서 이들이 다양한 그룹 활동을 직접 기획해 나갈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 각 기수를 이끄는 리더격인 허들링 커뮤니티 매니저(CM) 중 일부는 자신과 같은 자립준비청년을 위한 비영리 단체를 조직해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네요. 소이프 명예 졸업을 한 셈이죠. '빌더'도 지난 6년간 소이프 활동을 지원한 든든한 후원군입니다. 자립준비청년에게 지속적인 교육이 이어질 수 있도록 동참하는 소이프의 정기회원 격인데요. 매월 회비(1‧2‧3‧5‧10만원 중 택일)를 내면 3개월에 한 번꼴로 소이프 양말, 수건 등 갖가지 리워드(보상) 제품을 보내주는 겁니다. 오는 11월께 출시될 한국콜마와의 협업 제품 역시 이곳 사회공헌 담당자가 소이프 빌더로 꽤 오래도록 활동한 인연 덕분이라네요. 소이프가 운영하고 있는 멘토링 프로그램인 '허들링'에서 자립준비청년들이 도자기 만들기 활동을 하고 있다. 사진 소이프 "저마다 일어서는 방법은 제각각이죠"고 대표가 소이프를 끌어오며 크고 작은 일을 만날 때마다 되뇌는 마음의 소리가 있습니다. 기다림입니다. 디자인 교육을 진행하다 보면 중간에 이탈하는 자립준비청년도 곧잘 만납니다. 처음부터 마음을 활짝 열기는 더욱 어렵죠. 매우 큰 돈은 아니지만, 급히 차비 정도 필요하다 건네줬더니 연락을 일시적으로 끊는 경우도 가끔 있습니다. 이럴 때마다 채근하거나 마음을 조급히 먹진 않습니다. 한 번씩 집으로 불러 따뜻한 밥을 함께 먹기도 하고, 할 수 있는 한 기다려봅니다. 일로 만난 사이가 아닌 사람을 만나 연을 맺은 게 먼저이기 때문이죠. 인터뷰가 끝날 무렵 고 대표가 소이프 수건 한쪽에 박힌 이미지를 가리키며 얘기합니다. "넘어지면 바로 벌떡 일어서길 바라죠. 누구나 처음부터 바르게, 꼿꼿이 설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리저리 흔들리며 춤추듯 일어서기도 하죠. 저마다 일어서는 방법은 제각각이잖아요. 일률적으로 보지 말고 각자를 존중해 달라는 아이들의 목소리인 거죠" 자립준비청년의 '자립'을 두고 갖가지 모습을 형상화해 담은 소이프 수건. 처음부터 꼿꼿이 서지 않아도, 춤추며 일어서는 등 자립하는 방식도 각양각색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사진 소이프 인터뷰 원문보기 > https://www.joongang.co.kr/newsletter/bicnic/9970